"통섭", 말의 잔치만이 아니길...

네이버 검색엔진으로 "통섭"이라고 쳐보니 최신 뉴스 카테고리에도 관련 기사가 제법 뜨기 시작하는 것 같다. <통섭>을 번역한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통섭"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반가운 일이다. 물론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어줍잖은 비빔밥으론 곤란하다"라는지, "생물학중심의 통섭은 곤란하다"라든지, "과학의 통합에 대한 철학적 반대 논변을 무시했다"라든지..다양한 의견들이 들려온다. 오해도 있고 일리도 있는 비판들이다. ...

하 지 만...윌슨의 <통섭>을 정말로 다 읽어보고 곱씹어 본 후에 이런 비판들을 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번역하면서 깜짝 놀랐던 사실 한가지는, 그가 자신의 컨실리언스를 주장하기 위해 "정말로" 나노과학, 신경과학, 미학, 윤리학, 과학사, 과학철학 등을 공부했다는 사실이다. 사회생물학과 생태학 등은 그의 세부 전공 영역이니 당연할테고....가장 최근까지(출간년도를 기점으로) 출간된 주요 연구성과들이 참고문헌에 인용되어 있고 실제로 그걸 본문에서 녹여내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했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진화론의 전설"이라고도 불리는 에른스트 마이어의 <이것이 생물학이다>라는 책과 한번 비교해봐라. 그 책에서 마이어는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신경과학과 분자생물학은 여기서 제외되었다"라고...신경과학과 분자생물학이 빠진 책에 과연 <이것이 생물학이다(This is Biology)>라는 제목을 달아줄 수 있을까? 민망하지 않은가? 

나는 윌슨의 논증이 "엉성하다"는데는 동의한다. 철학자의 눈으로보면 그렇게밖에 안보인다. 더군다나 학문 분야들간의 "교량법칙(bridge law)"이 있어야만 환원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철학자의 시각으로는 통섭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작전일 수 있다. 하 지 만...과학철학/진화생물학을 10년 정도밖에 공부하지 못한(?) 나로서는...그의 작업을 nice try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고 싶다.. 내가 알기로는, 나노/신경/분자 과학 등이 어느 정도 길을 찾아가는 시점에 이정도의 통합 노력을 실제로 해본 학자는 전세계에서 윌슨이 유일하다. 그리고 윌슨은 그 어디에서도 "다 이루었다"고 하지 않았다. 방향, 전망, 그리고 사례를 제공하고 "우리는 이런 길로 갈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일종의 "운명"같은 것을 얘기했을 뿐이다. 

출간된지 30년이나 된 <사회생물학>에서 정작 인간에 대해서는 1/10도 얘기하지 못했던 그가 20여년 만에 예전의 위용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통섭>을 들고 나올 수 있었던 저력은 그의 옛 "사회생물학" 지식이 아니었다. 그는 그 20여년간 나노/분자/신경/철학/과학사 등을 공부했다. 나노과학 전문가/분자생물학자/신경과학자/철학자....심지어 진화심리학/생태학자들....이런 세부 전문가가 해당 챕터만 읽어보면 "기초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윌슨이라는 한 사람은 그걸 엮어 하나의 큰 틀을 제시하려고 애를 쓴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혹은 하지 않은) 매우 독창적인 작업이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윌슨이 <통섭>을 통해 인류에게 선사해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생각해보려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첫째, 통섭은 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인가, 아니면 집단적인 작업인가? 통섭의 주체에 관한 물음이라 하겠다. 윌슨은 그걸 자신의 머리 속에서 "혼자" 시도해본 경우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다빈치, 뉴턴...등등 소위 "르네상스적 지식인"의 경우가 대체로 이런 경우이다. 사상사의 관점에서보면 아직 집단적으로 이런 작업을 해본 경험은 우리에게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한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집단적으로는 시도 중인 일로 일단 통섭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통섭적 마인드와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집단적으로 통합 작업을 하게 되는 경우가 집단적 통섭 작업의 가장 최적 환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섭에 대한 방법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둘째, 통섭의 결과는 사람인가, 작품인가, 아니면 제도인가? 우리가 통섭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형태의 아웃풋을 얻으려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것은 첫째 물음과도 연관이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살짝 다르다. 답이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길러내도록 뭔가를 마련해야 할 것이고, 작품이라면 누가 어떤 형태로 협업을 하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가 될 터이며, 만일 제도라면 분과들을 재배열하거나 삭제및 첨가하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상호배타적인 사안들이 아니며 심지어 셋이 모두 같이 갈 수도 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혹시 말 잔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말이 먼저 돌아야, 즉 인구에 회자되어야 뭔가 거사가 진행되는 것이니 대의를 위해서는 말의 과잉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느 대학 구석을 봐도 통섭을 위한 액션은 아직 보이지 않아 좀 섭섭하다. 대학교수 초빙란 중 어디에서도 "통섭 정신을 갖고 실천해온 해당분야 박사"를 초빙한다는 식의 멘트는 아직 보질 못했다. 꼭 교수공고가 아니라 어느 연구소의 연구원 자리라도 이런 비슷한 멘트는 찾을 수 없다. 간혹 융합과학(나노바이오 같은) 전문가(?)를 뽑는 공고가 나 -  내 취직자리하고는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 반가울 뿐이다. "철학과 생물학의 통섭 전문가를 초빙합니다"라는 멘트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이게 나의 아쉬움이다. 결국 학과 통합 등의 방법을 통해 통섭을 지향하더라도 결국 진행하는 주체는 집단이건 개인이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키우는 일은 어쩌면 제일 중요한, 통섭의 첫걸음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마지막 걸음일 수도... 통섭을 시도해온 사람, 통섭정신을 공유한 사람, 통섭 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 결국 이런 사람들이 미래 학문을 만들어가는 거라 생각한다. 

나이 80이 되도록 최근 논문과 책을 읽고 토론하고 연구하고 책을 쓰는 윌슨 같은 사람들이 많아질 때 통섭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게 아닐까? 

나는 이런 사람들이 나올 수 있도록 밭을 갈아준 그들의 지식 문화가 정말 부럽다. 공부하는 "척"이 아니라 공부를 정말 "즐기는" 그네들의 문화가 부럽다. 교실에 들어와 어제 읽은 네이쳐 아티클에 대해 한마디 커멘트를 다는 교수들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교실이 너무 부럽다. 반 이상의 타과 학생들과 시작한 강의가 학기말에는 비슷한 실력의 학생들을 내보내는 그런 통섭의 교실이 부럽고 무섭다.

http://www.nature.com/nature/journal/v446/n7139/full/446949a.html
      

by andologist | 2007/04/27 14:3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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